1960년대 서아프리카 반란은 잔인한 분쟁, 세계 최고 기근, 인도주의 실현과 여러 구호단체를 낳았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도 그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위기
1967년 7월 6일, 동나이지리아에서 비아프라(Biafran) 주와 이그보족(Igbo)의 독립을 위한 반란이 시작됐습니다. 군사 독재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기 시작했고, 음식, 의약품 및 생필품 공급을 봉쇄하면서 수천만 명의 실향민들은 고립되었습니다.
1968년에는 기근 수준까지 다다랐습니다. 아일랜드 신부였던 앵거스 피누케인(Aengus Finucane)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사람들이 도움을 구걸하며 여기저기서 몰려왔어요. 아이들은 울부짖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어갔고, 부모들은 자식들을 땅에 묻으며 울었죠.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기근에 시달려 뼈만 남은 비아프라 아이들의 사진은 세계 신문과 방송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들의 아픔은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떠올리게 하며 아일랜드 전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비아프라를 향한 그들의 대응
아일랜드의 젊은 경제학자 존(John)과 보험업자 케이 오로린 케네디(Kay O’Loughlin Kennedy)는 비아프라 주민들을 조금이라도 돕길 원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몇 주 만에 아일랜드에 최초 모금 캠페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구호선 보내기(Send One Ship) 즉, SOS 캠페인으로 알려졌습니다.
모금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봉쇄지역에 구호품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먼저 식량과 의약품을 실을 구호함선 '컬림실’(Columcille)을 확보한 후, 서아프리카에서 떨어진 사오토메(Sao Tomé)섬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야간 공수를 통해 물품을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의 탄생
사람들의 모금 행렬이 이어지면서 모금 활동과 구호를 위한 단체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렇게 컨선월드와이드의 모태인 ‘아프리카 컨선(Africa Concern)’이 탄생했습니다. 더 나아가 Joint Church Aid(JCA) 항공의 조종사와 함께 수송기를 확보해 가봉 리브리빌(Libreville in Cabon)에서 비아프라까지 자체 항공편을 개설했습니다.
나이지리아 공군은 활주로를 폭파시키며 계속 압박했지만, 비아프라 사람들은 매일 밤 작은 불빛 속에서 다시 활주로를 고치고 구호 물품들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분쟁 2년 동안 총 5,314건의 수송 작전을 수행했고, 6만 톤이 넘는 구호물품을 전달했고, 25대의 수송기가 파괴되었으며 약 200만 명의 목숨이 어둠 속에 묻혔습니다. 이는 역사 속 최대 비전투 공수작전이자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비아프라가 낳은 컨선월드와이드
1960년대가 끝나면서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1970년 1월 15일 승리를 거두며 독립 지역들을 휩쓸었습니다. 인도주의적 노력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도 나이지리아에서 추방당하는 등 전쟁의 여파에 휩쓸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퇴역 군인들은 비아프라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호활동을 하며 인도주의를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프리카 컨선’은 1972년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사이클론 볼라(Bhola) 피해현장을 지원하며 인도주의적 관심이 세계로 뻗어 나갔고, 지금의 ‘컨선월드와이드’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서아프리카 반란은 잔인한 분쟁, 세계 최고 기근, 인도주의 실현과 여러 구호단체를 낳았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도 그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위기
1967년 7월 6일, 동나이지리아에서 비아프라(Biafran) 주와 이그보족(Igbo)의 독립을 위한 반란이 시작됐습니다. 군사 독재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기 시작했고, 음식, 의약품 및 생필품 공급을 봉쇄하면서 수천만 명의 실향민들은 고립되었습니다.
1968년에는 기근 수준까지 다다랐습니다. 아일랜드 신부였던 앵거스 피누케인(Aengus Finucane)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사람들이 도움을 구걸하며 여기저기서 몰려왔어요. 아이들은 울부짖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어갔고, 부모들은 자식들을 땅에 묻으며 울었죠.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기근에 시달려 뼈만 남은 비아프라 아이들의 사진은 세계 신문과 방송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들의 아픔은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떠올리게 하며 아일랜드 전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비아프라를 향한 그들의 대응
아일랜드의 젊은 경제학자 존(John)과 보험업자 케이 오로린 케네디(Kay O’Loughlin Kennedy)는 비아프라 주민들을 조금이라도 돕길 원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몇 주 만에 아일랜드에 최초 모금 캠페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구호선 보내기(Send One Ship) 즉, SOS 캠페인으로 알려졌습니다.
모금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봉쇄지역에 구호품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먼저 식량과 의약품을 실을 구호함선 '컬림실’(Columcille)을 확보한 후, 서아프리카에서 떨어진 사오토메(Sao Tomé)섬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야간 공수를 통해 물품을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의 탄생
사람들의 모금 행렬이 이어지면서 모금 활동과 구호를 위한 단체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렇게 컨선월드와이드의 모태인 ‘아프리카 컨선(Africa Concern)’이 탄생했습니다. 더 나아가 Joint Church Aid(JCA) 항공의 조종사와 함께 수송기를 확보해 가봉 리브리빌(Libreville in Cabon)에서 비아프라까지 자체 항공편을 개설했습니다.
나이지리아 공군은 활주로를 폭파시키며 계속 압박했지만, 비아프라 사람들은 매일 밤 작은 불빛 속에서 다시 활주로를 고치고 구호 물품들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분쟁 2년 동안 총 5,314건의 수송 작전을 수행했고, 6만 톤이 넘는 구호물품을 전달했고, 25대의 수송기가 파괴되었으며 약 200만 명의 목숨이 어둠 속에 묻혔습니다. 이는 역사 속 최대 비전투 공수작전이자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비아프라가 낳은 컨선월드와이드
1960년대가 끝나면서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1970년 1월 15일 승리를 거두며 독립 지역들을 휩쓸었습니다. 인도주의적 노력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도 나이지리아에서 추방당하는 등 전쟁의 여파에 휩쓸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퇴역 군인들은 비아프라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호활동을 하며 인도주의를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프리카 컨선’은 1972년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사이클론 볼라(Bhola) 피해현장을 지원하며 인도주의적 관심이 세계로 뻗어 나갔고, 지금의 ‘컨선월드와이드’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습니다.